액화천연가스(LNG), 새로운 에너지 외교의 중심
액화천연가스(LNG)는 천연가스를 극저온으로 냉각해 액체 상태로 만든 것으로, 부피가 약 600분의 1로 줄어들기 때문에 파이프라인이 없는 지역으로도 선박을 통해 수송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 덕분에 LNG는 지정학적 리스크를 회피할 수 있는 유연한 자원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2020년대 들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불안, 미중 갈등 등이 격화되면서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핵심 수단으로 부상했습니다.
미국은 셰일가스를 통해 자급자족형 에너지 구조를 구축한 이후, 본격적으로 LNG 수출국으로 전략을 전환했고, 현재는 카타르, 호주와 함께 세계 3대 LNG 수출국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텍사스, 루이지애나 등에 있는 LNG 액화 터미널(Freeport, Sabine Pass, Corpus Christi 등)을 거쳐, 유럽과 아시아로 LNG를 공급하고 있으며, 일부 터미널은 유럽 전용 계약(PPA 포함)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유럽의 탈러시아 전략, 미국에 기대는 이유
러시아와 유럽은 지리적으로 가까워 파이프라인을 통한 천연가스 공급이 매우 효율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정학적 위기가 이를 ‘의존에서 위험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러시아는 가스 공급을 무기화했고, 파이프라인은 더 이상 안정된 에너지 경로가 아닌 협박 수단이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유럽은 멀더라도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국가, 즉 미국, 노르웨이, 카타르, 알제리 등으로 공급원을 다변화하는 방향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특히 미국산 LNG는 파이프라인보다 비싸고 물리적 거리도 멀지만, 선박 수송을 통한 유연한 공급 조절, 장기 계약 체결의 안정성, 지정학적 중립성이라는 장점이 있습니다. 유럽은 이러한 요소들을 감안해, 일정 부분 비용을 감수하고라도 에너지 안보와 외교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값어치 있는 선택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유럽은 단지 미국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북해의 노르웨이 가스전, 카타르·알제리의 LNG 수입 확대, 동지중해 해상 가스전(이스라엘, 키프로스) 등의 공급원을 통해 ‘LNG 공급 다층화 구조’를 설계하고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재생에너지, 수소 인프라, 원자력 투자도 병행함으로써, 단기·중기·장기의 시간 축을 나눠 스스로의 생존 전략을 복원력 있게 설계하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유럽은 오랫동안 러시아의 천연가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습니다. 그러나 2022년 이후 러시아의 공급 중단과 노르드스트림 파이프라인의 기능 상실로 인해, 유럽은 에너지 안보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공급망 다변화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즉각적인 대안이 된 것이 바로 미국산 LNG였습니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주요 EU 국가들은 급속히 LNG 수입 인프라를 확장하고 있으며, 독일은 특히 노르드스트림 중단 이후 브룬스뷔텔(Brunsbüttel), 빌헬름스하펜(Wilhelmshaven) 등에 부유식 LNG 터미널(FSRU)을 신속히 배치했습니다. EU는 미국과 장기 LNG 수입계약을 체결하며, 에너지 안보를 확보하는 동시에 러시아의 영향력으로부터 탈피하려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LNG 수출은 단순한 경제 이익을 넘어 외교적 지렛대가 됩니다. LNG 수입국과는 장기 계약을 통해 경제적 의존도를 형성할 수 있고, 공급량·가격·지속가능성 등의 조건을 조율하면서 미국 중심의 에너지 질서를 확대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지 에너지 문제가 아니라, 전략적 파트너십 재구성의 일환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쉽지 않은 길: 가격, 인프라, 친환경성의 과제
하지만 미국산 LNG 수입이 만능 해답은 아닙니다. 우선, 미국 LNG는 파이프라인 천연가스보다 가격이 비쌉니다. 액화·운송·기화 과정이 추가되기 때문이며, 2022~2023년에는 국제 시장 가격 급등으로 유럽 소비자들의 에너지 빈곤 문제가 심화되기도 했습니다. 저소득층 가구가 난방비와 전기료를 감당하지 못해 사회복지 예산이 급증한 사례도 있었고, 일부 국가에서는 긴급 에너지 바우처 정책이 시행되기도 했습니다.
둘째, LNG 수입 인프라가 완전히 갖춰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부유식 터미널(FSRU)은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장기적 안정성이나 저장 용량, 연결 파이프라인 구축 측면에서 한계가 명확합니다. 지속 가능한 수입을 위해서는 육상 저장설비, 배관망, 기화 설비 등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고, 이러한 인프라는 지역 커뮤니티와의 이해 충돌, 환경영향평가 등의 절차를 포함하여 수년이 걸릴 수 있습니다. 또, 항만 접근성이나 기후 조건 등도 새로운 입지 확보를 어렵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기후정책과의 충돌 문제입니다. LNG는 기존 화석연료보다는 친환경적이지만, 엄연히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자원이기 때문에, EU의 탄소중립 로드맵과 얼마나 조화될 수 있느냐는 꾸준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도입 이후, 에너지 믹스의 친환경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미국 LNG가 일시적 필요 충족을 위한 과도기적 자원인지, 장기 전략 자원인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탄소 배출량을 간접 포함한 '그레이 LNG'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며, 일부 환경 단체들은 LNG 인프라에 장기적 투자하는 것이 결국 탄소 의존도를 고착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 내에서도 LNG 수출을 둘러싼 논쟁은 있습니다. 수출이 확대될수록 미국 내 천연가스 가격이 상승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부 제조업체나 가정 소비자 단체는 해외 수출보다 국내 안정 공급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으며, 이는 향후 LNG 수출 정책이 외교와 경제 사이에서 균형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과제가 될 수 있습니다.
유럽의 선택: LNG 이후의 길은?
결국 유럽은 미국 LNG에 대한 의존과 동시에 재생에너지 확대, 수소에너지 전환, 에너지 효율 개선 등 다양한 전략을 병행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독일은 태양광과 풍력 비중을 높이면서도, 단기적으로는 천연가스를 통한 ‘전환기 에너지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으며, 프랑스는 소형모듈원자로(SMR)와 같은 차세대 원자력 발전소 투자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EU 차원에서는 에너지 공동구매 및 비축 시스템, 대륙간 수소 인프라 구축 계획, 탄소배출권 개혁 등이 논의 중이며, 이는 미국과의 에너지 동맹을 지속하면서도 에너지 주권과 기후 목표를 동시에 지키려는 전략적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유럽의 선택은 미국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다층적인 생존 전략을 설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