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비축유는 단지 '비상용 기름 창고'가 아니다
미국 정부가 보유한 전략비축유(SPR, Strategic Petroleum Reserve)는 단순히 국가의 '비상용 기름 창고'로만 이해되기엔 그 의미가 훨씬 더 큽니다. 이 제도는 1970년대 오일쇼크의 경험에서 출발한 것으로,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미국이 공급망 충격에 대비해 만든 국가 차원의 석유 비축 시스템입니다.
SPR은 미국 텍사스와 루이지애나 등지의 지하 염동 저장소에 위치해 있으며, 최대 약 7억 배럴에 이르는 원유를 저장할 수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비축 시설입니다. 원칙적으로는 전쟁, 자연재해, 국제 유가 폭등 등 ‘극단적 상황’에서만 비축유를 방출할 수 있도록 규정돼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SPR은 정치적으로도 주목받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특히 바이든 행정부가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유가 급등에 대응하기 위해 대규모로 비축유를 방출하면서, 이 제도의 존재와 목적, 활용 방식에 대한 다양한 오해와 논란이 이어졌습니다.
바이든 정부의 SPR 방출, 효과였나 무리수였나?
2022년 봄, 바이든 대통령은 역사상 최대 규모인 1억 8천만 배럴의 전략비축유 방출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그해 여름까지 매일 100만 배럴에 가까운 원유를 시장에 공급하는 계획으로, 미국 내 휘발유 가격 안정을 목표로 했습니다. 당시 미국 내 에너지 소비자들은 팬데믹 이후 인플레이션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이중 충격 속에서 급등하는 기름값에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특히 미국 내 물류 산업, 트럭 운송업자, 저소득층 가정 등은 연료비 상승으로 생계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고 있었고, 휘발유 평균 가격은 갤런당 5달러를 넘어서며 역사적 고점을 찍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정치권에도 커다란 부담이 되었고, 중간선거를 앞둔 민주당 입장에서는 민생 문제 해결이 시급한 의제로 부상한 시점이었습니다.
당시 유가는 배럴당 120달러를 넘나들며 서민 경제에 직격탄을 날리고 있었고, 미국 내 휘발유 평균 가격도 정치적 부담이 상당했습니다. 이에 따라 SPR 방출은 ‘민생 물가 안정’이라는 명분 아래 감행되었지만, 그 효과와 장기적 타당성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평가가 엇갈립니다.
한편으로는 유가가 실제로 하향 안정세를 보였다는 점에서 단기 효과는 분명했습니다. SPR 방출 이후 국제 유가는 점차 배럴당 80달러 선으로 내려앉았고, 국내 휘발유 가격도 완만한 하락세를 보이며 일시적인 시장 안정에 기여했습니다.
백악관은 이를 두고 "역사적 개입을 통한 물가 완화 효과"라며 적극 홍보했지만, 그 효과가 단기적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에너지 전문가들이 신중한 평가를 내렸습니다. 실제로 글로벌 시장은 SPR 방출이 반복되면 '이제 미국 정부는 언제든 유가를 억제할 수 있다'는 신호를 받게 되어 가격에 대한 기대심리가 왜곡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었습니다.
하지만 반대편에서는 '비상시에 대비하라'는 SPR의 원칙을 훼손한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됐고, 일부에서는 비축유가 중국을 포함한 해외 시장으로 흘러들어갔다는 보도도 나오면서 논란이 더욱 커졌습니다. 실제로 에너지부가 공개한 수출입 자료에 따르면, SPR에서 방출된 일부 원유가 미국 내 정제 시설을 거쳐 해외로 수출되었고, 이 과정에서 중국 국영 정유회사에 일부 물량이 도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는 자유시장 체계상 불가피한 흐름이라 해명했지만, 미국 내 여론은 즉각적으로 반응했습니다. 특히 공화당 측은 "국민을 위한 비축유가 경쟁국의 이익으로 전용되었다"며 강하게 비판했고, 에너지 안보가 사실상 외부로 유출된 셈이라는 정치적 프레임도 형성되었습니다.
또한 SPR 방출은 시장의 가격 기대심리를 자극하여 공급 부족에 대한 공포를 늦출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생산능력 확대 없이 가격을 인위적으로 낮추는 방식은 결국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제기되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단기적인 심리적 안도감을 줄 수는 있지만, 실제로 에너지 수급의 근본적인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가격 상승 압력을 장기적으로 막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실제로 2023년 후반에는 SPR의 재충전이 지연되면서 '미국의 에너지 방패가 약해졌다'는 비판도 나왔습니다. 정부는 낮은 유가 시기에 SPR을 재충전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예산 문제와 시장 조건, 그리고 정치적 논란 등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비축량 회복 속도는 더뎠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이 미래의 진짜 위기 상황에서 신속히 대응할 수 있는 여력이 부족해졌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습니다.
트럼프와 바이든의 SPR 전략, 무엇이 달랐는가?
트럼프 행정부는 SPR을 시장 개입보다는 비상대비 수단으로 간주하며, 유가가 급락했던 2020년 팬데믹 초기에는 오히려 유가가 낮을 때 SPR을 '저가에 대량 충전하는 기회'로 활용했습니다. 그는 당시를 "국가가 연료 자산을 가장 싸게 매입할 수 있는 역사적 기회"라고 평가하며, 실제로 당시 배럴당 20~30달러대까지 떨어졌던 유가를 활용해 비축유를 적극적으로 보충했습니다. 이는 SPR의 원래 취지인 '위기 대비용 방패' 역할을 강화한 사례로, 트럼프의 에너지 전략이 공격보다 방어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반면 바이든 행정부는 SPR을 적극적인 물가 조정 수단으로 활용했습니다. 유가를 바로 낮추기 위해 시장에 개입하는 데 SPR을 썼고, 이는 정책의 방향성과 SPR의 존재 목적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즉, 하나의 제도를 두고 '충전의 무기'로 쓸 것인가, '방출의 수단'으로 쓸 것인가라는 철학적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 셈입니다. 바이든은 SPR을 유가 억제용 레버리지로 보고 있었고, 시장에 즉각적인 공급 신호를 주기 위해 SPR을 활용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비상 자산을 과도하게 사용한 것 아니냐’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트럼프는 SPR을 포함한 에너지 정책 전반을 ‘에너지 자립’과 ‘국가 안보’ 차원에서 해석했지만, 바이든은 기후 변화 대응과 물가 안정이라는 목적에서 에너지 정책을 조율했습니다. 트럼프는 석유와 가스를 지렛대로 활용해 에너지 외교를 펼치고, 미국 내 생산 확대를 통해 국제 정치에서의 협상력을 키우고자 했습니다. 반면 바이든은 화석연료 감축과 재생에너지 확대라는 시대적 과제를 반영하여, SPR을 보다 단기적이고 기능적인 수단으로 접근했습니다.
이처럼 SPR 하나를 두고도 정권의 철학에 따라 운용 전략은 극명하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난 것입니다. SPR은 단순한 저장고가 아니라, 정책의 우선순위와 세계관, 경제 해석 방식이 그대로 투영되는 도구라는 점에서, 두 행정부 간의 접근 방식은 단지 '타이밍'이나 '정치적 목적'의 차이를 넘어, 국가 에너지 철학의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한국 독자가 이 전략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
대한민국은 전체 석유의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는 국가로서, 에너지 안보가 매우 취약한 구조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에너지 전략’이라는 주제가 여전히 낯설고, SPR과 같은 제도는 '미국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SPR의 운용 방향은 단지 미국 내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 유가의 흐름, 국제 무역 질서, 한국의 수출입 원가, 산업 생산 비용, 나아가 환율과 물가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이 SPR 방출을 결정하면 단기적으로 국제 유가가 안정되고, 이는 곧 한국 기업의 수입 원가 부담을 줄이는 긍정적 신호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SPR 재충전 과정에서 국제 시장에서 원유를 대량 매입하면, 유가가 다시 상승할 수 있으며, 이는 수출 주도형 산업 구조를 가진 한국 경제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정유, 항공, 해운, 석유화학 산업과 같이 원유 가격에 민감한 산업군은 SPR 정책의 방향에 따라 직접적인 영향을 받습니다.
이처럼 전략비축유는 단지 미국의 문제를 넘어서, 글로벌 공급망과 지정학적 경제 전략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SPR을 둘러싼 논의는 결국 ‘누가 시장을 움직이는가’, ‘국가가 에너지를 어떻게 전략화하는가’에 대한 더 큰 질문으로 이어지며, 한국 또한 이 흐름 속에서 에너지 수급 전략과 외교 전략을 연계해 생각해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