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어처럼 들리지만, 정치의 심장부에 있던 구호
"드릴 베이비 드릴(Drill, baby, drill!)"이라는 말은 언뜻 들으면 미국식 유머 같기도 하고, 광고 문구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구호는 실제로 미국 정치의 중심에서 등장했고, 트럼프 전 대통령의 에너지 정책을 관통하는 상징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이 구호는 원래 2008년 미국 대선 당시, 공화당 부통령 후보였던 세라 페일린(Sarah Palin)이 사용하면서 대중적으로 퍼졌습니다. 당시 미국은 고유가와 경기 침체를 동시에 겪고 있었고, 공화당은 '미국 땅에 있는 자원은 우리가 직접 캐내자'는 논리를 내세우며 이 구호를 반복적으로 외쳤습니다. 이후 "드릴 베이비 드릴"은 보수 진영에서 자국 내 석유와 천연가스 자원 개발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상징적인 표현이 되었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 구호를 다시 끌어올리며, 미국의 에너지 정책을 전면적으로 전환시켰습니다. 그의 정책 방향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에너지 독립'이라는 국가 전략과 맞물린 현실적인 경제 정책이었습니다.
'에너지 독립'이라는 전략적 키워드
트럼프 행정부는 2017년 출범과 동시에 에너지 독립(Energy Independence)을 공식 슬로건으로 내걸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자원 자립을 넘어, 글로벌 지정학적 리스크에서 자유로운 국가가 되겠다는 선언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중동 산유국이나 러시아와 같은 지정학적으로 불안정하거나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힌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국 내 에너지 수요를 자체적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트럼프는 연방 정부가 보유한 광구에서의 석유·가스 시추 규제를 완화하고, 한때 오바마 행정부 시절 환경 문제로 중단되었던 키스톤 XL(Keystone XL) 송유관 프로젝트를 재가동하며, 인프라 중심의 에너지 확장을 본격적으로 추진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캐나다의 오일샌드에서부터 텍사스만 연안까지 석유를 수송하는 대규모 파이프라인 건설로, 북미 에너지 블록 형성의 상징적 사업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환경 규제보다 경제 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내세웠습니다. 당시 탄소 배출 규제나 친환경 에너지 전환 속도가 급격히 진행되면, 기존 화석연료 산업에 종사하던 수많은 미국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트럼프는 이 같은 산업 기반 유권자들에게 '당신들의 일자리를 되살리겠다'는 강한 메시지를 던진 것이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미국 내 셰일오일과 천연가스 개발에 대한 민간 투자를 적극 장려하면서, 미국은 텍사스, 노스다코타, 뉴멕시코주 등지의 셰일 자원을 본격적으로 상업화하기 시작했고, 2018년에는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를 제치고 세계 최대 석유 생산국이 되었다는 기록도 세웠습니다. 이로 인해 미국은 오랫동안 꿈꿔온 순수출국(Net Exporter)의 위상을 현실화했고, 중동산 원유에 대한 의존도도 눈에 띄게 낮아졌습니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드릴 베이비 드릴'은 단순한 보수층의 선동 구호가 아니라, 실제로 미국을 에너지 수출국으로 바꾼 정책적 실현 구호가 된 것입니다. 석유 한 방울이 외교적 지렛대가 되는 시대에, 이 구호는 미국 내외 정책의 무게중심을 바꾼 역사적 슬로건이기도 했습니다.
왜 다시 이 구호가 등장했는가?
2025년 현재,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집권을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는 1기 행정부 시절의 에너지 정책이 "미국을 강하게 만들었다"고 강조하며, 다시 '드릴 베이비 드릴'을 외치고 있습니다.
이 구호가 다시 회자되는 배경에는, 바이든 행정부의 탄소중립 및 친환경 정책에 대한 보수 진영의 강한 반발이 있습니다. 특히 2022~2023년 동안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고, 전략비축유(SPR)가 빠르게 방출되면서 국내 여론은 "왜 기름값은 오르고, 우리는 직접 석유를 캐지 않느냐"는 의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때 트럼프가 외친 "드릴 베이비 드릴!"은 단순히 유권자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 가격 안정, 일자리 창출, 지정학적 자율성 회복이라는 메시지를 동시에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유권자들이, 과거 셰일 붐 당시의 미국 경제 회복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구호는 또다시 공명력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한국 독자들이 기억해야 할 포인트
이 구호는 단지 미국 보수층의 선동 문구가 아닙니다. 석유·가스 산업을 둘러싼 국제 질서, 에너지 안보, 지정학적 리더십과 연결된 개념입니다. 트럼프의 구호는 그가 에너지를 '전략무기'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며, 이는 동맹국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어, 한국은 에너지의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미국산 LNG(액화천연가스)는 주요 도입선 중 하나입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LNG 수출을 일종의 '외교 카드'처럼 활용하기도 했고, 향후 재집권 시에도 에너지를 활용한 통상 압박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드릴 베이비 드릴'이라는 말 속에는 단지 유가 안정의 문제가 아닌, 국제 관계와 산업 전략, 기후 대응에 대한 균형 감각이 녹아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