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BRICS는 기존 금융 시스템을 견제하려 하는가?
브릭스(BRICS)는 단지 경제적으로 성장한 신흥국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미국과 유럽이 주도해온 글로벌 금융 시스템의 구조적 불균형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기존 국제기구들이 신흥국의 현실과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World Bank)은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 아래 설립된 이래, 미국과 유럽이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습니다. 의결권 배분 구조도 여전히 선진국 중심이며, 자금 지원을 받을 때 요구되는 조건들도 많은 신흥국들에게는 경제적 주권을 침해받는 부담으로 작용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브릭스는 더 이상 이러한 기존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금융 인프라를 구축하고자 하는 전략적 목표를 세운 것입니다.
브릭스 개발은행: 신개발은행의 역할
이러한 배경 속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브릭스 개발은행, 즉 신개발은행(New Development Bank, NDB)입니다. 2015년에 설립된 이 은행은 브릭스 국가들이 공동으로 자본을 출자하여 만든 다자간 금융기관으로, 주로 개발도상국들의 인프라 투자와 지속가능한 발전을 지원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본사는 중국 상하이(Shanghai)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 브라질 상파울루(São Paulo), 러시아 모스크바(Moscow), 인도 뉴델리(New Delhi) 등에도 지역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어 다국적 금융 기관으로서의 운영 기반을 갖추고 있습니다.
NDB는 기존 세계은행(World Bank)이나 아시아개발은행(Asian Development Bank, ADB)과는 확연히 다른 접근 방식을 추구합니다. 세계은행과 ADB는 주로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운영되며, 자금 지원 시 정치적 조건이나 시장 자유화, 구조 조정 등의 요구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NDB는 회원국들의 상황과 요구를 반영하는 융통성 있는 방식으로 운영되며, 정치적 중립성과 내정 불간섭의 원칙을 강조합니다. 실제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재생에너지 프로젝트나 인도의 교통 인프라 확장 사업 등은 이러한 방식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신흥국들이 '대안 금융 질서'를 구축하고자 하는 움직임의 일환으로 해석됩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이러한 흐름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보이지만, 비공식적인 분석가들은 브릭스의 공동 금융망 확장과 달러 패권에 대한 도전이 미국의 국제적 금융 영향력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한 바 있습니다.
공동 통화 논의: 미국 달러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
브릭스는 최근 몇 년 사이 공동 통화 도입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달러 의존도 탈피'라는 강력한 동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전 세계 무역과 금융 거래의 상당 부분이 미국 달러(USD)로 이루어지는 현 시스템에서, 많은 신흥국들이 환율 변동에 따른 불안정성과 미국의 금융 제재에 대한 취약성을 절감해 왔습니다.
브릭스 공동 통화는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각국이 자국 통화로 무역 결제를 시도하거나, 중앙은행 간 통화 스와프 협정을 체결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점진적인 디달러라이제이션(de-dollarization)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중국은 이미 일부 교역에서 루블과 위안화 결제를 확대하고 있으며,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공동 디지털 통화 도입을 시사한 바도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경제적 선택을 넘어, 국제 금융 주도권을 놓고 벌어지는 지각변동의 일환이라 볼 수 있습니다.
BRICS PAY: 자체 결제 시스템의 실험
브릭스의 또 다른 시도 중 하나는 '브릭스 페이(BRICS Pay)'로 알려진 자체 결제 시스템 구축입니다. 이는 SWIFT와 같은 기존의 국제 결제망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브릭스 국가들 간의 무역과 투자 흐름을 더욱 원활하게 하기 위한 대안입니다.
SWIFT(Society for Worldwide Interbank Financial Telecommunication) 시스템은 전 세계 200여 개국의 은행 및 금융기관들이 사용하는 국제 송금 네트워크입니다. 각 금융기관은 고유한 SWIFT 코드를 가지고 있으며, 이 코드를 기반으로 안전하고 표준화된 방식의 자금 이동이 가능합니다.
대한민국 역시 대부분의 은행이 SWIFT에 가입되어 있고, 국민은행, 하나은행, 우리은행 등에서 국제 송금을 할 때 SWIFT 코드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SWIFT는 미국과 서방국가들이 금융 제재를 실행할 때 자주 활용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러시아는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일부 은행이 SWIFT에서 퇴출되면서 국제 금융 거래에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경험한 브릭스 국가들은 외부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고자 독립적인 결제 인프라 마련에 나선 것입니다.
브릭스 페이는 각국의 모바일 결제 시스템과 연동하여 범국가 간 실시간 결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러시아와 중국, 인도 등 일부 국가에서는 기술적 실험이 이미 진행 중입니다.
2025년 3월 현재로서는 대한민국 내에서 브릭스 페이를 사용하는 기업이나 금융기관은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 없으며, 한국 정부 역시 미국과의 전략적 동맹 관계를 고려해 브릭스 금융망에 직접적인 참여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일부 무역 관련 기업들이 중국 또는 러시아와의 원화-위안화, 원화-루블화 결제 방식 등을 개별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사례가 보도된 적은 있습니다.
이러한 결제 시스템은 단순히 기술의 발전이 아니라, 외부 압력으로부터 자율적인 금융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정치·경제적 전략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안 체제 구축의 의미와 미래
결국 브릭스가 추진하고 있는 여러 프로젝트들은 하나의 공통된 목표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존의 서방 중심 질서에 대한 '대안 체제(alternative system)'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세계는 점점 더 다극화되고 있으며, 미국과 유럽이 모든 것을 결정하던 시대는 서서히 저물고 있습니다. 브릭스는 이 흐름 속에서 신흥국들의 이해와 목소리를 반영하는 새로운 플랫폼으로서, 경제적 독립성과 정치적 자율성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도전에는 여전히 많은 장애물이 존재합니다. 회원국 간의 이해관계 차이, 정치 체계의 이질성, 기술적 인프라의 격차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릭스의 실험은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체를 갖춘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앞으로 글로벌 금융 질서의 핵심 변수 중 하나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도 존재하는 브릭스 내부의 균열과 현실적인 한계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과연 브릭스는 지속 가능한 협력체로서 앞으로도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그 가능성과 과제를 함께 짚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