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1971년, 닉슨 쇼크 이후 세계는 금본위제를 떠나 '신용 기반의 화폐(fiat money)'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금은 더 이상 통화를 뒷받침하는 기준이 아니게 되었고, 대신 각국의 통화 가치는 중앙은행의 정책과 정부의 신용에 의해 결정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금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세계 경제의 핵심 자산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오늘날 중앙은행들은 여전히 금을 보유하고 있으며, 최근 들어 금 보유량을 오히려 늘리고 있는 추세입니다. 특히 러시아, 중국, 인도, 터키 등 신흥국 중앙은행들은 2010년대 이후 공격적으로 금을 매입해왔고, 유럽 국가들도 금 보유를 재확인하거나 금의 국내 보관을 강화하는 등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 국가는 대부분 브릭스(BRICS) 또는 브릭스 플러스(BRICS+, 확장 협의체)와 연계되어 있으며, 이는 미국 중심의 달러 시스템에 대한 전략적 견제와도 맞물려 있습니다. 터키는 아직 브릭스의 정회원은 아니지만, 브릭스 플러스 회의에 참여하며 점점 더 협력의 틀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투자 목적을 넘어서, 지정학적 리스크와 달러 중심 시스템에 대한 구조적 불신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특히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미국과 유럽은 러시아의 약 3천억 달러 상당의 외환보유고를 동결하는 초강수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경제 제재가 아닌, 국제 금융 시스템을 무기화한 대표적 사례로 평가됩니다. 러시아는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시스템에서도 퇴출되었고, 주요 기업들의 철수와 수출입 제재, 반도체 및 기술 장비 차단 등의 조치로 경제 전반에 걸쳐 거대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러시아 국민들 역시 이 여파를 체감해야 했습니다. 루블화 가치가 폭락하며 수입물가가 급등했고, 외국산 상품과 금융 서비스 접근성이 크게 제한되었으며, 해외 결제 서비스와 글로벌 온라인 플랫폼도 차단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국제통화 시스템이 '달러 중심'이라는 구조 하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따라서 많은 국가들은 이 사건을 통해 '달러에 의존하는 외환보유고는 언제든 자산 동결이라는 리스크로 돌아올 수 있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고, 그 대안으로 다시 물리적으로 존재하고, 외부 통제에서 자유로운 금을 떠올리게 된 것입니다.
이제 금은 단지 오래된 자산이 아니라, 디지털 시대의 가장 아날로그적인 안전자산으로서 재조명받고 있습니다. 통화 주권과 외환 안전성, 국제제재 회피 수단 등 다양한 전략적 목적 속에서, 금은 다시 한 번 세계 중앙은행들의 금고 안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왜 중앙은행은 금을 계속 사는가?
금은 이자도 없고, 배당도 주지 않으며, 심지어 산업적으로 활용되는 범위도 제한적인 자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은행들이 금을 선호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첫째, 금은 국가 간 신뢰와 가치 보존 수단입니다. 금은 국가의 지급준비자산으로, 통화 발행의 신뢰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며, 위기 상황에서는 마지막 보루가 됩니다.
둘째, 법정화폐 시스템의 리스크 헷지(hedge)입니다. 신용 기반 화폐는 본질적으로 인플레이션이나 통화가치 하락에 취약합니다. 특히 미국처럼 국가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상황에서, 달러의 신뢰도는 언제든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이럴 때 금은 '비정치적 자산'이자 '글로벌 공통의 가치 저장 수단'으로 기능합니다.
셋째, 실물 자산으로서의 안전성입니다. 금은 사이버 공격, 금융 시스템 붕괴, 디지털 통화의 실패 등 다양한 현대 리스크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전기가 필요 없는 자산,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자산이라는 점은 여전히 많은 국가에 강력한 안정감을 줍니다.
민간 투자자에게도 여전히 살아있는 자산
중앙은행뿐 아니라 일반 투자자에게도 금은 여전히 매력적인 자산입니다. 특히 금 ETF의 등장은 금 투자의 접근성을 크게 넓혀주었습니다. ETF는 실물 금을 보관하는 기관이 발행한 상품으로, 주식처럼 쉽게 사고팔 수 있으며, 금값과 직접적으로 연동됩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SPDR Gold Shares(GLD), iShares Gold Trust(IAU) 등이 글로벌 투자자들에게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각국의 금 통장, 골드바, 금화, 금 주얼리 투자 등 실물 금에 대한 관심도 꾸준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특히 고물가와 저금리 상황에서는 금이 단기 수익보다는 장기 보존 가치의 자산으로 주목받게 됩니다. 인플레이션이 심한 시기에는 금값이 강세를 보이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역사적으로도 반복된 현상입니다.
결국 금은 투자자와 중앙은행 모두에게 여전히 의미 있는 자산입니다. 세상이 불확실할수록, 믿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게 되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그 때마다, 금은 조용히 — 그러나 단단하게 —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믿음은, 위기 앞에서 더욱 강하게 작동합니다. 전 세계가 외환위기, 물가 상승, 전쟁과 정치적 갈등을 경험할 때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변하지 않는 가치를 갈망합니다. 그런 점에서 금은 단지 경제적 자산이 아니라, 인간이 위기 속에서 붙드는 '심리적 안전지대'가 되기도 합니다.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1997년 말, 외환위기라는 전대미문의 국가적 위기를 마주했을 때, 우리 국민들은 놀라운 방식으로 이 심리적 안전지대를 마주했습니다. 바로 '금'을 꺼내든 것이죠. IMF 위기 극복을 위한 국민적 금 모으기 운동은 단순한 모금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금이라는 실물 자산이 우리 민족의 기억 속에 얼마나 깊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왜 한국인들이 그렇게 금을 아꼈고 사랑했고, 심지어는 위기 속에서 자발적으로 그것을 내놓을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한국인의 정서 속에서 금이 가진 의미는 단순한 자산 이상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편 예고▶️ "한국인의 금 사랑: 금반지에서 IMF 금 모으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