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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과 연준의 권한 강화: 금본위제 붕괴와 통화정책 독립의 역사

by 업타운 위너 2025. 3. 11.

1929년 대공황, 연준은 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는가?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이라 불리는 날을 기점으로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주가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며칠 동안 공포에 휩싸인 투자자들은 대량으로 주식을 매도했고, 주식시장은 단기간에 90% 가까이 폭락했습니다. 수많은 개인 투자자와 기업들이 순식간에 전 재산을 잃었고, 은행은 예금 인출 사태를 감당하지 못한 채 연쇄적으로 파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출 시장은 마비되었고, 실업률은 25%를 넘어서며 미국 경제는 마치 '얼어붙은'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처럼 깊고 장기적인 침체 상황을 경제학자들은 '대공황(Great Depression)'이라 명명했습니다. 1907년의 금융공황(Panic of 1907)이 단기적인 충격에 가까웠다면, 1929년 대공황은 구조적이고 전방위적인 붕괴를 의미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문제는, 이미 설립된 연방준비제도(Fed)가 이 위기 상황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당시 연준은 과열된 시장에 대한 우려로 통화 공급을 줄이고 금리를 인상하는 긴축 정책을 선택했는데, 이는 유동성 부족으로 고통받던 은행들과 기업들에 더 큰 타격을 안겼습니다. 연준의 조치는 의도와는 달리 불신과 공포를 더욱 증폭시켰고, 금융기관들의 연쇄 파산을 막지 못한 채, 전체 경제가 순식간에 마비되는 데 일조하고 말았습니다.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애나 슈워츠(Anna Schwartz)는 그들의 저서 『미국의 통화사』에서 연준의 이러한 소극적 대응이 대공황을 더욱 심화시킨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였다고 지적했습니다. 당시 연준은 아직까지도 중앙은행으로서의 명확한 정책 도구나 리더십이 부족했고, 내부의 구조적 혼란과 지역별 연방준비은행 간의 불협화음도 컸습니다.

 

대공황은 연준에게도 중대한 전환점을 의미했습니다. 단순히 유동성을 조절하는 기능을 넘어, 실질적으로 경제 전체를 안정화시킬 수 있는 정책 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연준은 어떻게 대공황을 계기로 진짜 중앙은행이 되었을까요? 금본위제 폐지부터 연준법 개정까지, 그 역사적 전환을 설명하는 업타운 위너스 블로그 글의 썸네일 이미지 입니다. 이 이미지는 업타운 위너스 블로그 운영자가 미드저니라는 이미지 생성 프로그램과 캔바를 활용하여 제작한 것으로, "A conceptual digital illustration of the Federal Reserve system in action, showing FOMC, interest rates, and quantitative easing mechanisms, clean infographic style, pastel color scheme, futuristic layout"라는 프롬프트를 사용하여 생성했습니다.
대공황과 연준의 권한 강화: 금본위제 붕괴와 통화정책 독립의 역사 - 업타운 위너스 이미지 제공

 

 

금본위제의 붕괴와 루스벨트의 과감한 선택

 

1933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대공황 극복을 위한 일련의 조치들이 시행되었습니다. 참고로 그는 앞서 언급된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과는 먼 친척 관계로, 사촌 사이에 해당됩니다. 시어도어는 공화당 소속의 개혁적 대통령이었고, 프랭클린은 민주당 소속으로 대공황의 위기에 맞서 국가를 재건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역사적인 "뉴딜 정책(New Deal)"을 통해 대규모 공공사업과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도입했습니다. 수많은 실업자들을 공공 인프라 건설에 동원하고, 은행 개혁과 금융 감독 기관을 새롭게 정비했으며, 사회보장제도의 기틀을 마련함으로써 미국 사회 전반에 복지와 회복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뉴딜 정책은 단순한 경기 부양책을 넘어, 경제 구조 자체를 재편하고 연준의 역할까지 새롭게 규정하는 폭넓은 개혁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금본위제(Gold Standard)의 사실상 폐지였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3년 금준위법령을 통해 개인의 금 보유를 금지하고, 시중에 유통되던 금을 연방정부에 매각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금 1온스를 20.67달러로 고정해 두고 있었지만, 루스벨트는 이를 35달러로 재조정하여 달러의 가치를 의도적으로 절하시켰습니다. 그 목적은 수출을 촉진하고, 국내 물가를 높여 디플레이션을 막으며 경기 회복을 도모하는 데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금본위제와 금태환제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금본위제는 통화 발행량이 보유한 금의 양에 의해 직접 결정되는 제도이고, 금태환제는 정부가 일정 비율로 금과 통화를 교환해주는 제도입니다. 루스벨트가 폐지한 것은 전자, 즉 금본위제였으며, 이후 1971년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이 금태환제까지 종료시키면서 완전히 금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금본위제의 폐지는 당시 많은 비판과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결과적으로 미국의 통화정책이 더 이상 금 보유량에 얽매이지 않고 유연하게 운영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습니다. 연준은 그 이후부터 자율적으로 통화량을 조절하고, 기준금리 인상과 인하를 통해 경기를 부양하거나 억제할 수 있는 실질적인 정책 권한을 갖게 된 것입니다.

 

 

 

1935년 연준법 개정, 중앙은행다운 중앙은행으로

 

1935년에는 이러한 구조적 개혁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연방준비법(Federal Reserve Act)'이 전면 개정됩니다. 이 개정을 통해 연방준비제도이사회(Board of Governors)의 권한이 명확히 강화되었고, 통화정책 수립과 감독 권한이 워싱턴에 집중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사회(FRB)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7인의 이사로 구성되며, 이 중 한 명이 의장(Chair)을 맡는 구조로 재편됩니다. 이는 지역별로 분산된 12개 연방준비은행에 비해 중앙의 판단과 지휘가 우선되는 방향으로 재구성된 것으로, 연준이 명실상부한 '중앙은행'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계기였습니다.

 

또한 이때부터 연준은 공개시장조작(Open Market Operations)을 본격적으로 운용하기 시작했으며, 기준금리 조정과 지급준비율 관리 등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중앙은행의 주요 정책 도구들이 실질적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통화정책의 독립성과 연준 의장의 권한

 

이 시기를 지나면서, 연준은 점차 미국 경제 정책의 핵심 기구로 자리잡게 됩니다. 특히 루스벨트 대통령 이후, 트루먼 행정부와 아이젠하워 행정부를 거치며 연준의 정치적 독립성이 중요한 이슈로 부상하게 됩니다.

 

통화정책이 단기적인 정치 목표에 종속되지 않고, 장기적인 경제 안정을 위해 작동해야 한다는 원칙이 제시되었고, 그 결과 연준 의장의 발언 하나에도 시장이 출렁이는 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 이후 폴 볼커(Paul Volcker), 앨런 그린스펀(Alan Greenspan), 벤 버냉키(Ben Bernanke), 재닛 옐런(Janet Yellen), 제롬 파월(Jerome Powell) 등 시대를 대표하는 연준 의장들이 시장과 직접 소통하며 세계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지요.

 

오늘날 연준물가 안정, 고용 증진, 금융 시스템의 안정이라는 세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는 복합적인 정책 기관으로 진화했습니다. 하지만 그 나무가 뿌리를 내리기까지는, 대공황이라는 혹독한 시련과, 통화정책 구조의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