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채, 왜 전 세계가 사들이는가? 외환보유고와 기축자산으로서의 위상
미국 국채는 단지 미국인의 자산이 아닙니다. 전 세계의 중앙은행, 정부, 투자기관들이 보유하는 글로벌 금융시장의 핵심 자산이자, 기축자산(reserve asset)으로 기능합니다. 여기서 '기축자산'이란, 단순히 투자 수단이 아니라 국제 경제에서 공통적으로 신뢰받고 널리 사용되는 기준 자산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기축통화'로서 미국 달러를 많이 들어봤듯이, '기축자산'은 그 달러를 기반으로 운용되는 안전하고 유동성 높은 자산을 뜻하며, 그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미국 국채입니다. 이처럼 미국 국채는 단순히 '안전하다'는 이유를 넘어, 글로벌 금융 시스템이 의존하는 핵심 기둥 중 하나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왜 미국 국채가 외국 정부의 외환보유고 핵심으로 자리잡았는지, 미국 국채가 어떻게 '달러 시스템'을 떠받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한국을 포함한 각국이 어떤 전략으로 대응하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봅니다.
외국 중앙은행이 미국 국채를 보유하는 이유
1. 외환보유고 운용의 핵심 자산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은 외환보유고를 보유합니다. 외환보유고란, 자국 통화 가치를 안정시키고, 국제 무역 결제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보유하는 외화 자산입니다. 이 외화 자산의 상당 부분이 바로 미국 국채입니다.
한국은행도 수백조 원 규모의 외환보유고를 가지고 있으며, 그 중 큰 비중이 미국 국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미국 국채가 달러 자산 중에서도 가장 안전하고, 가장 유동성이 높은 자산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든 사고팔 수 있고, 채무불이행 위험이 사실상 없으며, 글로벌 금융시장이 위기 상황일 때도 가장 먼저 찾게 되는 자산이기 때문입니다.
2. 기축통화 시스템의 중심축
현재 세계 경제는 '달러 중심 체제' 위에 서 있습니다. 석유를 포함한 대부분의 국제 결제는 달러로 이루어지며, 국제기구(IMF, WB 등)의 기준통화도 달러가 중심입니다. 그런데 그 달러를 발행하는 미국 정부가 '달러의 신용을 보증하는 수단'으로 발행하는 것이 바로 미국 국채입니다.
다시 말해, 미국 국채는 단순한 투자 상품이 아니라 달러 시스템의 신뢰를 떠받치는 기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각국은 외환보유고를 달러화로 유지하는 것뿐 아니라, 그 달러를 국채 형태로 운용하면서 안전성과 수익성을 동시에 확보하려는 것입니다.
미국 국채가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갖는 위상
1. 글로벌 유동성의 중심 자산
국제 금융시장에서 자금이 움직이는 방식은 대부분 미국 국채 시장을 중심으로 흐릅니다. 미국 국채 금리가 상승하면 전 세계의 자산 가격과 자본 흐름이 바뀌게 됩니다. 한국, 일본, 유럽의 채권 금리도 미국 국채에 연동되어 움직이며, 심지어 신흥국의 환율도 이에 영향을 받습니다.
기관투자자들 사이에서는 미국 국채를 '현금과 유사한 자산'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언제든지 거래가 가능하고, 규모가 방대하며, 가격 정보가 투명하게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2. 국제 금융기관과의 연계성
IMF나 세계은행 같은 국제금융기구들도 미국 국채를 기준으로 SDR(Special Drawing Rights, 특별인출권) 가치를 산정하거나, 금융위기 시 유동성 공급의 기준 자산으로 활용합니다. 또한 글로벌 은행 간 결제 시스템(CLS, SWIFT 등)에서도 미국 국채와 달러가 중심이 됩니다.
이처럼 미국 국채는 단순히 수익을 위한 상품을 넘어서, 국제 자본시장의 신뢰를 구성하는 근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을 포함한 각국의 전략적 활용
1. 외환위기 방지와 금융안정
한국은행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은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외환보유고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외화 부족으로 국가 신용등급이 추락하고, 단기간에 외국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금융 시스템이 마비되는 위기를 겪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급하게 외화를 마련하기 위해 금 모으기 운동을 벌이기도 했고, 해외에서 고금리 외채를 급히 조달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충분한 외환보유고 없이 세계 자본시장에 노출되는 것은 치명적'이라는 교훈을 남겼습니다. 이후 한국뿐 아니라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외환보유고를 꾸준히 축적해왔으며, 그 보유고의 상당 부분을 미국 국채로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국채는 위기 상황에서도 환금성이 높고,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달러 자산이기 때문에, 국가 신용도 방어와 국제 금융시장 내 신뢰 확보를 위한 핵심 수단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실제로 위기 시에는 미국 국채를 매도해 달러를 확보하거나, 보유 규모를 일정 수준으로 유지함으로써 '안정된 국가'라는 이미지를 국제사회에 각인시키는 전략을 취합니다.
2. 지정학적 영향력과의 균형
한편, 중국,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브라질 등 주요 국채 보유국들은 미국 국채를 단순한 안전자산이 아니라 지정학적 전략 자산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은 2020년 기준 1조 달러 이상 규모의 미국 국채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미국 외채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중국은 무역 마찰이나 안보 갈등이 고조될 때, 국채 보유량을 조정하겠다는 신호를 보내며 미국에 간접적인 압박을 가하는 수단으로 이 자산을 활용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중국 국채 보유량이 소폭 감소할 때마다 금융시장에서는 미국의 금리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 촉각을 곤두세우곤 합니다.
일본은 미국과의 오랜 동맹관계를 바탕으로 미국 국채를 지속적으로 매입하며, 양국 간 금융협력을 강화해왔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 수출로 벌어들인 막대한 외화를 미국 국채로 전환함으로써, 정치적 협조와 안전한 자산 운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이처럼 미국 국채는 단순한 수익 수단을 넘어, 국제 외교와 군사·경제 전략의 조용한 수단으로도 활용되고 있습니다. 물론 국채를 대량 매도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손해가 되기 때문에 실제 실행은 조심스럽지만, 그 자체로 무언의 협상력을 지닌 수단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미국 국채는 세계 경제의 '토대'입니다
미국 국채는 단순한 투자 상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달러 시스템의 기초이며, 국제 자본시장의 기준점이며, 글로벌 신뢰를 담보하는 자산입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많은 국가들이 이 자산을 외환보유고로 보유하는 이유는 단순한 수익 추구 때문이 아니라, 금융 안정과 통화 신뢰, 국가 전략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 구조를 토대로, AI 시대와 디지털 금융 시스템 속에서 미국 국채의 위상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에 대한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