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심의 금융 질서, 균열의 조짐
20세기 중반 이후 전 세계는 달러화(USD)를 중심으로 한 금융 질서 속에서 움직여 왔습니다. 미국의 경제력, 군사력, 그리고 달러 결제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국제 금융 구조는 그 자체로 하나의 글로벌 표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 단극적 구조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신호들이 여기저기서 감지되고 있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중립성 부족'에 대한 우려입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미국과 유럽은 러시아의 외환 보유고를 동결하는 조치를 취했고, 이는 많은 국가들에게 경고를 주었습니다. 언제든지 정치적 이유로 자산이 동결될 수 있다는 사실은, 달러화에 대한 신뢰에 미묘한 흔들림을 가져온 것이죠.
사실 이러한 움직임은 이번 사태로 갑자기 촉발된 것이 아니라, 이미 수년 전부터 천천히 쌓여 온 불만과 불균형의 결과물입니다. 미국 중심의 금융 질서에서 소외감을 느껴온 개발도상국들과 신흥국들은, 점차 다른 대안을 고민해오고 있었습니다. 러-우 전쟁은 그 균열을 더욱 가시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뿐입니다.
특히 브릭스(BRICS) 국가들을 포함한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남반구 및 신흥국 중심 국가들) 국가들은, 이제는 특정 강대국이 아닌 다자적인 통화 체계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달러화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가져올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자국 통화 간의 직접 결제 확대, 공동 통화 논의, 블록체인 기반 결제 시스템 실험 등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습니다.
다극화된 통화 체제의 가능성
현실적으로 달러화의 지위가 단기간에 무너질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한 통화가 절대적 지위를 독점하는 시대는 서서히 저물고 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최근 국제결제은행(BIS)과 국제통화기금(IMF) 보고서에서도, 다극적인 통화 질서의 가능성을 주목하는 목소리가 늘고 있습니다.
유로화(EUR), 위안화(CNY), 엔화(JPY), 파운드화(GBP), 프랑화(CHF) 등 주요 교환성 통화들이 달러화와 병존하며 지역적 또는 분야별 기축통화 역할을 나눠 맡는 구조가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유럽 내 무역은 대부분 유로화로 결제되고, 동아시아 일부 국가에서는 위안화의 결제 비중이 점차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브릭스+ 국가들을 중심으로 달러 의존도를 줄이려는 움직임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브릭스 공동 통화 구상, 위안화 무역결제 확대, 브릭스 페이(BRICS PAY)와 같은 대체 결제 시스템 실험은 이러한 흐름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는 단순한 경제적 선택이 아니라, 지정학적 균형을 맞추기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볼 수 있습니다.
블록체인과 탈중앙 금융의 도래
기축통화의 미래를 이야기할 때, 기술의 발전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블록체인 기술은 기존의 중앙집중형 금융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재설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블록체인은 거래 내역의 위변조를 막고, 제3자의 개입 없이도 신뢰 기반의 거래를 가능하게 만들어 주며, '중앙'이 아닌 '네트워크'가 주도하는 경제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이끕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디지털 기축통화'에 대한 상상력도 점점 더 확장되고 있습니다. 비트코인(Bitcoin)은 아직까지 가격 변동성이 크고, 제도권 금융과의 연결 고리가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지만, 그 기반 기술인 블록체인은 기존의 중앙집중적인 금융 시스템을 흔들고 있습니다. 특히 신뢰할 수 있는 제3자 없이도 글로벌 거래가 가능한 구조는 기존의 기축통화 개념을 다시 정의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가격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시도들도 계속되고 있으며, 비트코인의 반감기(Halving) 시스템, 채굴량 제한, 글로벌 채택 확대와 같은 구조적 장치들이 미래에는 더 강력한 신뢰 기반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물론 정부 차원의 관여도 점차 커지고 있습니다. 최근 미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들이 암호화폐를 제도권 내에서 규제하고, 일부 국가에서는 정부가 보유한 비트코인을 국부 자산처럼 다루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탈중앙성'을 지향하는 비트코인이 현실에서는 정부의 통제나 규제 아래에서 새로운 질서 속에 편입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디지털 기축통화로서의 비트코인은 아직 갈 길이 멀지만, 탈중앙적 거래 생태계가 만들어내는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하며, 기존 질서를 바꾸는 중요한 축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의 개발 역시 이러한 흐름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각국 정부는 암호화폐가 만들어낸 기술적 혁신과 사용자 편의성을 수용하면서도, 자국 통화에 대한 통제력을 잃지 않기 위해 디지털 화폐 발행을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디지털 위안화를 이미 시범 운영하고 있으며, 유럽중앙은행(ECB)과 미국 연준(Fed)도 디지털 유로화, 디지털 달러에 대한 논의를 활발히 진행 중입니다. 이러한 노력들은 중앙과 탈중앙, 전통 금융과 디지털 금융이 한 무대 위에서 복잡하게 얽혀 움직이고 있는 역동적인 시대를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결국 미래의 기축통화 체제는 단일한 중심이 아닌, 다양한 통화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공존하고 경쟁하는 다극적 구조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신뢰, 유동성, 기술,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네 가지 축이 상호작용하게 될 것입니다.